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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때가 되면 무르익고 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 인간의 삶도 자연과 마찬가지다. 한 시대가 번창하면 언젠가 지고 몰락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그동안 번창한 부를 누렸던 귀족계층이 몰락하면서 신흥자본계층이 새롭게 흥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젖어 사는 귀족 여인 라네프스카야를 중심으로, 이 흐름의 이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자 영지, 즉 구 러시아를 상징하고 있는 ‘벚꽃동산’. 아름답고 낭만적인 첫인상의 제목과 달리, 이미 화려한 벚꽃은 지고 이젠 빗물에 떨어져 내리는 쓸쓸한 나뭇가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줄거리
귀족 가문의 여인 라네프스카야는 파리에서 5년 만에 러시아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는 아름다운 벚꽃동산의 소유자다. 하지만 화려한 귀족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썼고 빚도 늘어났다. 이 벚꽃동산엔 그녀의 친오빠 가예프와 수양딸 바랴와 친딸 아냐, 그리고 여러 명의 하인들이 살고 있다. 빚에 쪼들리자 벚꽃동산을 경매에 넘겨야 하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로빠힌이라는 지주는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이 가문의 농노로 지내왔다. 해방령 이후 상인이 되어 자수성가한 그는, 이 가문에 대한 옛정으로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 경매일까지 이 동산에 별장을 지어 임대료를 받아 이자를 갚아 나가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벚꽃동산은 과거의 찬란함이자 추억이다. 별장을 짓기 위해 벚꽃나무를 베고, 영지를 나눠 임대하는 것이 천박하고 싫었던 그녀는, 로빠힌의 계속되는 제안에도 이를 거절했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다시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는데, 결국 경매가 진행되고 그 경매에서 영지를 산 사람이 다름 아닌 로빠힌였던 것이다. 과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부엌 근처도 못 가보고 농노로 일했던 이곳을 자신의 땅으로 만든 것이 기뻤던 로빠힌. 그는 이 영지를 잘 활용하기 위해 벚꽃나무를 잘라내고 별장을 짓기로 한다. 라네프스카야와 그녀의 가족들은 결국 이곳을 떠나 흩어졌다. 뒤이어 이 가문을 위해 오래도록 일한 86세의 하인 피르스는, 병원에서 돌아왔지만 자신을 잊고 모두 떠난 빈 저택에 남아 쓸쓸히 죽어갔다.
인물 해석
라네프스카야는 부유한 과거에 잡혀 현재에 적응하지 못하는 귀족계급의 지주다. 그간 희극에서 종종 이처럼 과거의 영광 속에서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인물들이 많았지만, 그녀에게는 ‘욕망’이 없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속 ‘블랑쉬’는 과거의 영광과 초라한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정신분열증이 오고,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로 끄집어와 되살리려는 욕망이 있지만, 라네프스카야는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과소비만 할 뿐, 다시금 딛고 일어서려는 욕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과거는 추억이자 집착에 더 가깝다. 이미 무너져버린 가문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잘 살아갈 생각을 해야 하는 데, 경제에 무지하고 현실감각이 없는 그녀는 그저 추억에 잠겨있기만 하다. 그런 그녀의 해맑고 철없는 모습은 하다못해 하인들마저 스스로를 귀족처럼 입고 먹고 생각하게 만든다. 해방령에도 집안에 남아있는 이들은 귀족 여인처럼 꾸미고 고운 손을 지녔으며, 벚꽃을 보며 시가를 피우고 프랑스를 동경한다.
가장 오래된 하인 피르스의 말로는, 19세기 러시아의 몰락하는 귀족계층의 최후를 대변한다. 한때 버찌를 생산해 잼을 만들어 팔던 것을 회상하며 중얼거리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늙은 모습은, 이젠 쓸모없고 낡은 고목 벚꽃나무와 같다.
가난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두 딸은 벚꽃동산에는 관심이 없다. 어머니의 헤픈 씀씀이가 걱정이 되지만 그저 예전처럼 풍족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기에 로빠힌의 현실적인 조언에는 역시 무지하다.
아냐는 만년 대학생에 지식인처럼 굴지만 이상적인 소리만 늘어놓는 트로피모프와 사랑에 빠진다.
바랴는 이 상황에 발을 동동 굴리고 애써보지만 실질적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바랴와 로빠힌. 이들은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로빠힌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고 이 둘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신흥자본계층과 새 시대를 상징하는 로빠힌은, 끊임없이 화합을 도모하고 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웠으나 끝내 손을 잡지 않았다.
이토록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물들과 달리 로빠힌은 누구보다 열심히 깨우치고 자수성가한 상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부터 이 벚꽃동산에 몸담아온 그의 가족은 농노였다. 해방령 이후 그는 자유를 선택했지만, 이곳에 대한 정과 연민으로 위기에 놓인 이 가문을 도와주려 한다. 경제에 눈과 귀가 밝은 그는, 경매 위기에 놓인 이 동산을 지키려면 별장을 세워 임대료를 받는 방법이 최선이기에 열심히 제안한다. 그리고 이 제안은 변화하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가문의 상징인 벚꽃나무를 없애는 것, 그리고 영지를 나눠 돈을 받는 것이 ‘귀족스럽지 않은’ 이들은 과거의 영광에 발목을 붙잡히길 택한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결국 실망한 채 포기한다.
이윽고 경매 날이 다가오고, 기예프가 살 줄 알았던 영지는 돈이 부족해서 사지 못했고 결국 최종 낙찰은 로빠힌에게로 돌아갔다. 이 동산은 이 가족들뿐 아니라 로빠힌에게도 과거의 추억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힘들게 일하시던 이곳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 되었다. 이젠 마음껏 이곳을 누비고 개척해 나갈 수 있다. 그간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흐름에 발맞춰간 결과이기에 자랑스러울 것이다.
트로피모프는 그를 곧 백만장자가 될 것이지만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맹수’ 같다고 표현한다. 그는 처음부터 맹수가 아니었다. 먹이로 태어난 그는 맹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달려왔다. 하지만 맹수도 언젠간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법이기에,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이 당연한 자연의 섭리 앞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 안톤체홉의 특징
안톤 체홉의 희곡은 사실적인 소재에 아주 사실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극적인 내용과 극적인 캐릭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처음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입체적이지 않고 밋밋한 인물들, 거기다 심지어 인물들도 많고 이름도 다 비슷비슷하다.
초반에는 러시아 삘 낭낭한 이름들이 안 익어서 계속 등장인물 소개를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클라이맥스가 될 만한 큰 사건도 없이 ‘벚꽃동산이 팔린 덴 다, 팔릴라 한다, 팔린다, 팔렸다’ 이 단순한 4막의 구성도 신선했다. 이 극을 다 읽고 연극도 보고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서, 안톤 체홉이 희극의 거장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사실주의는 어떠한 과장도 첨가도 없이 우리 주변의 사건과 사람들로 이루어진 담백한 것이고, 이 담백한 것이 주는 울림은 그 어떤 첨가제보다 우리에게 큰 공감을 준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 인물이나 시대를 넘어서 인간 본연에 자리 잡은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들이기에, 우린 19세기 러시아에 살고 있지도, 귀족계층도 아니지만 그들과 함께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
리뷰
첨단 기술이 발달하고 흐름이 변하는 속도는 지금이 훨씬 빠르다. 이 주마등 같은 속도의 현장에 사는 우리들도 알고 있다. 끊임없이 배우고 따라가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발은 정신없이 뛰어가면서 마음은 머물러 있다. 누구나 간직하고 싶은 영광스러운 추억은 있기 마련이다. 그 추억이 집착이자 미련이 되지 않게 간직하는 법도 필요할 것이다. 이 극에서 라네프스카야를 단순히 멍청하고 오만한 여인네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추억을 나아가기 위해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누구나 힘들고 슬픈 일이기에. 피르스가 자신을 잊고 모두 떠난 자택 앞에서 말한다. ‘한 평생을 살았지만 마치 거짓말처럼 금방 지나가버렸어.’ 그렇게 벚꽃은 피고 지고 피고 지는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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