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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리 큐브릭 감독

    미국의 영화 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처음 접한 건 우연히 '꿈의 노벨레'라는 소설을 읽고 그 음란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이즈 와이드 셧'을 보게 되었을 때였다.

    그 후 예전에 봤던 '로리타'도 이 감독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고 가장 유명한 대표작인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고자 마음먹었다.

    나도 본성과 욕망을 갖고 있는 똑같은 인간인지라, 종종 그런 주제를 다루는 그의 영화를 몰래(?) 보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재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은 완벽주의적 성향에 그 만의 미학과 새로운 기술들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남겼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샤이닝>,<시계태엽 오랜지>,<아이즈 와이드 셧> 등이 있다.

     

    리뷰

    사실 이 작품을 보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되었으나 정말 보기까지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시간이 걸렸다. 대충의 내용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폭력적이고 잔인하다는 얘기도 많아서 망설여졌다.

    보통 난 영화를 볼 때, 조용한 새벽에 불을 다 꺼놓고 혼자 보는 편이라 너무 무섭다 싶은 건 시간대를 잘 잡아 봐야 하는 데, 이 영화 평들을 보니 수위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에 쉽사리 보질 못했다.

    가끔 대표 스틸 컷으로 눈에 고정 장치를 걸어 놓은 장면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거기서 분명 눈알을 찌르고 파내는 장면이 나온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 부류에선 명성이 자자한 '소돔의 120일' 까진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쯤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큰맘 먹고 어느 주말 대낮 양기 가득한 곳에서 드디어 이 영화를 시청하기에 이른다. 침대 이불을 눈까지 끌어당기고, 집중을 돌릴 과자들과 음료를 양손에 끼며, 온갖 요란을 떤 채 보고 난 후의 소감은 '생각보다 볼만하다'였다. 폭력이나 잔인함도 여느 19금 액션 영화에서 볼 법한 정도였고 선정성은 생각보다 수위가 높았지만 가족들과 보는 게 아니라면 괜찮을 듯하다. 어차피 영화의 내용 상 불필요한 장면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걱정했던 고어 한 장면도 없었고 당연히 그 스틸 컷에서 눈알을 파내고 찌를 일도 전혀 없었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고민으로 이 명작을 보는 것을 미루고 있다면 괜한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감을 전하고 싶다. 그대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두 눈 뜨고 즐겁게 봤다면 큰 무리 없이 감상할 수 있다. 

    해석

    이 작품과 ‘아이즈 와이드 셧’, ‘로리타’ 등 감독의 이 전 작품들도 인간의 본성과 욕망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비해 영화 속 분위기와 색감은 꽤나 아름답고 예쁘다. 그것이 주제와 극명한 대비를 이룸으로써 그 아이러니가 주는 충격이 생생하다. 무자비한 범죄를 일삼는 주인공 알렉스와 무리들은 위아래로 하얀 옷을 입고 하얀 마네킹과 함께 하얀 우유를 마신다. 그에 반해 피해자들은 빨간색, 초록색, 주황색 등 선명한 원색의 의상과 인테리어로 색감 대비를 이루고 있다. 언뜻 지나가는 장면만 보면 이 영화의 주제를 잊을 만큼 그 조화가 아주 예쁘고 화려하다. 고결함, 깨끗함을 상징하는 하얀색을 피해자가 아닌 악당들에게 입히고, 조커를 보는 듯한 강렬한 색감들을 피해자들이 가져감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 범죄 속 피의자와 피해자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사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피해자 = 선’이라는 무의식 속 성립이 정말 옳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커도 ‘악’이라는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빌런은 아니지 않나

    화려한 인테리어와 소품 등 볼거리가 많은 만큼 그것들이 주는 상징을 찾는 재미도 크다. 가령 정액과 마약을 의미하는 하얀 우유라던가, 성적 욕망을 보여주는 성기 모양의 소품과 팝아트적인 여성의 누드 액자, 범죄자 동료들이 법의 상징인 경찰이 된 것, 알렉스의 음악 취향. 굉장히 다양하고도 뻔한 클리셰와 은유, 상징들이 범벅 되어 있다. 워낙 다양한 의미와 해석들이 존재하고 돌아다니지만 사실 그게 맞고 틀리고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영화 자체에서 대놓고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 연출에서 느껴지는 그 느낌 그대로만 이해해도 충분하다.

     

    줄거리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 알렉스의 잔혹한 폭력과 범죄행위에서 시작된다. 무고한 노숙자들을 폭행하고 무단 침입과 강도, 강간까지 세상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무자비한 악행을 일삼는다. 끝내 살인과 친구들의 배신으로 감옥에 가고 종말에는 자살을 택하며 단순히 ‘폭력은 나쁘다’에서 비롯한 권선징악을 내포하는 듯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폭력은 ‘알렉스’가 아닌 ‘국가’가 선사하는 폭력이다. 알렉스는 수감 중,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퇴소할 수 있게 해주는 ‘범죄 갱생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은 국가가 교도소의 자리와 경비가 부족하자 단순히 ‘범죄율을 감소’ 하고자는 목적으로 몇몇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다. 실험의 원리는 익히 알려진 개들을 훈련할 때 쓰는 ‘폴란다스의 개’ 실험에서 착안했다. 개에게 밥을 줄 때 계속 종을 치면서 밥을 주면, 나중에 개는 밥이 없이 그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구역질과 두통 등 고통을 호소하는 약물을 주입하고 지속적으로 잔인한 폭력과 강간을 행하는 영상에 노출시키면, 끝내는 스스로 그러한 상황에 노출되어도 저절로 고통이 밀려와 행하지 못한다는 원리다. 뇌의 인지 반응을 통한 실험이다.

    하지만 이 실험의 결과엔 허점이 있다. 이런 고통이라는 과민반응은 결코 스스로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다. 그 실험이 종료된 후, 알렉스는 눈앞에서 자신을 조롱해도, 여자가 알몸으로 다가와도, 공황장애와 발작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범죄자 갱생 프로그램. 과연 그는 갱생된 것이 맞는가?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악에서 선으로 탈바꿈 된 것이 맞는가? 국가는 알렉스의 모든 자유의지를 앗아갔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게 아닌 저지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렉스에게 동정이나 위로의 감정을 느끼기엔 애매하다. 그는 무고한 사람을 때리고 성폭행을 저지른 악랄한 범죄자기 때문이다. 우리도 뉴스를 통해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보면서 차라리 거세를 시키든 사형을 시켰으면 좋겠지, 그들에게 되도 않는 참회할 기회를 주기를 원치 않으니까. 알렉스는 물리적인 거세를 하였고, 마음으로 진정한 반성을 한 것이 아니기에, 석방 후에도 역시나 권선징악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 양아들을 들인 부모님의 집에서 밀려나게 되고, 자신이 때렸던 노숙자에게 폭력을 당한다. 자신과 함께 범죄를 저질렀던 동료들은 민중의 지팡이, 국가와 법의 상징인 경찰이 되어 도리어 그를 폭행한다. 도망치듯 피신해 들어간 집이 예전에 자신이 침입해 강간과 폭행을 저질렀던 노인의 집. 목욕을 하면서 무심코 불렀던 'singing in the rain'의 노래에 노인은 그가 자신의 와이프를 강간해 자살에 이르게 했던 놈인 것을 알아차린다. 알렉스는 실험 과정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던 베토벤의 no.9 교향곡을 듣게 함으로써 그 곡만 흘러나와도 약물반응을 일으키는 불상사를 안게 된다. 노인은 그를 항해 no.9교향곡을 틀었고, 알렉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곡을 들으며 고통 속에서 뛰어내리는 선택을 한다. 알렉스를 향한 피해자들의 복수. 충분히 사이다 같은 복수지만 어딘지 모르게 더부룩하고 편하지 않다. 그들이 입은 맞지 않는 색색의 의상처럼. 자살시도에 실패한 알렉스는 결국 병원에서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 치료를 받게 된다. 마지막 순간 그는 no.9이 흘러나올 거대한 스피커 앞에서 성관계를 하는 상상을 온전히 해내며, 자신이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고 말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그의 치료는 완전히 끝이 났다. 퇴원 후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선택의 기회와 자유의지를 갖게 된 그는 스스로 참회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피해자들에게 다시 복수를 하며 예전과 같은 범죄자의 삶을 선택할까. 그의 앞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선택이 무엇이든, 우리는 범죄자에게 인권을 부여하고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정부가 그들을 통제하고 억압해서 범죄를 줄이는 것에만 집중해야 할지를 고민해 보게 되었고 결국 선과 악, 피해자와 피의자의 구분과 진정한 참회에 대한 정의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것에 대한 정의를 이 영화 제목의 어원인 'orang' 오랑우탄처럼 과연 우리 인류가 내리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신에게 맡겨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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