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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집단적인 광기와 종교적 신앙과 만나 인간 깊은 곳의 추악함과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 극은 우리에게 삶의 궁극적인 방향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신의 뜻을 인간이 대신 전달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게 맞는 걸까? 용서와 자비는 누구로부터 구해야 하는 걸까

    줄거리

    세일럼이란 한 마을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마을 소녀들이 벌거벗고 춤을 추는 것을 패리스목사에게 들키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그 곳에 함께 있던 패리스목사의 딸 베티가 혼날 것이 두려워 기절한 척 움직이지 않자 악마에게 씌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에비게일 이라는 하녀는 자신을 향한 악마와 거래를 했다는 의심을 피하고자 또다른 하녀 티투바가 시킨 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연기로 또 한 사람을 거짓으로 고발한다. 바로 자신이 예전에 하녀로 일했던 집주인 존 프락터의 아내 엘리자베스다. 존 프락터와 내연을 했고 그를 갖고 싶은 마음에 아내를 고발하기로 한 것이다. 에비게일은 존 프락터네 하녀 메리가 인형을 만들고 바늘을 잃어버릴 까봐 꽂아 놓은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배에 바늘을 꽂은 채 목사에게 찾아간다. 엘리자베스의 영혼이 찾아와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말에 마을 서장과 판사는 존 프락터에 집으로 향했고, 바늘 꽂인 인형이 발견되자 엘리자베스는 결국 끌려간다. 이렇게 에비게일과 소녀들의 장난을 시작으로, 엘리자베스 외 죄 없는 마을사람들이 잡혀가는 큰 소란이 벌어진다. 존 프락터는 메리에게 법정에서 증언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법정에서 에비게일과 소녀들은 지금 메리의 영혼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다며 광란에 사로잡힌 연기를 시작하자, 메리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악마와의 내통을 인정하고 죄를 용서하면 풀려나지만 부인할 시에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메리는 결국 자신도 악마를 보았음을 인정하고 이 모든 일은 악마와 내통한 존 프락터의 계략이라고 거짓 고발을 한다. 끝내 존 프락터는 자신과 에비게일의 내연을 사실대로 얘기하고 모든 것이 창녀인 에비게일이 악마를 보았다고 연기하며 꾸며낸 짓이라고 한다. 이 법정의 재판장 댄포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정직하고 고결한 엘리자베스가 사실을 증언할 것이라고 했지만, 앞의 상황을 몰랐던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죄를 감싸기 위해 간음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끝내 부부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곧 존 프락터의 집행이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으로 존 프락터의 자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을에서 선망이 높았던 존 프락터의 교수형은 분란을 일으킬 것이다. 자신의 판결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하는 댄포스, 이미 사람들의 신뢰를 잃고 자신의 입지가 밀려나는 것이 두려운 패리스 목사, 그리고 부부가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목숨 만을 부지하길 바라는 해일 목사. 엘리자베스를 찾아가 남편을 설득해보라고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은 존 스스로에게 달려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서로에 대한 진심 그리고 용서를 구한 끝에 존은 살고 싶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법의 권위와 증명을 위해 다른 선량한 이들의 고발을 요구했고 자백에 서명을 하게 했다. 그의 이름이 적힌 서명문을 교회문에 내걸려고 하자 끝내 존 프락터는 서명서를 찢는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더럽힐 순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선함을 발견한 존 프락터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며 막을 내린다.

    ​인물 해석

    이 극의 마지막에서 진정한 선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존 프락터는 이 악마사건에 선동되지 않는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하녀 에비게일과 간음을 한 죄까지 지었다. 7개월간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몸이 아프고 임신까지 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엔 무리였다. 간사하고 영악한 에비게일이 악마를 본다는 장난질로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도 된 건 마냥 마을을 휘젓고 다니다 끝내 아내를 고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에비게일은 아내를 죽이고 자신과 달아날 계획을 꿈꾸고 있다. 메리에게 증명을 해주길 부탁하지만 에비게일과 소녀의 압박에 못견뎌 끝내 존 프락터를 고발한다.

    에비게일에게 사랑은 집착이고 집착은 광기가 되었다. 이 비극의 시작이자, 그 어떤 히어로물에 비교해도 어마어마한 빌런인 에비게일은, 처음엔 단순히 자신이 악마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작했다가, 존 프락터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그의 아내까지 고발하기에 이른다. 존에게 그녀는 ‘그게 설령 죄가 될지라도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 사랑이 그 어떤 죄악도 능가할 수 있다는 그녀의 생각은 앞으로 그녀가 저지를 수없이 많은 죄의 기준이자,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한마디에 사람들은 물론 목사와 재판장까지 좌지우지하는 걸 맛본 그녀는 오만하게도 하나님의 심판의 자격마저 가져오려 한다. 메리를 다시 자신의 편으로 되돌리기 위해 법정에서 거짓 연기를 펼치고, 나머지 소녀들까지 하나되어 소리치는 장면은 다시 봐도 소름 끼친다. 집단광기와 전체주의 앞에 인간은 처절히 무너지고 사악해진다. 그리고 죽음 앞에 인간은 힘이 없다. 메리는 끝내 무릎을 꿇고 존 프락터를 희생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원하고 사랑하는 존 프락터는 그녀의 손 아래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죽음을 선택한 존은 메리에게 ‘우리가 다시 볼 곳은 지옥이다’ 라고 한다. 누가 보아도 숭고한 존과 레베카의 죽음은 모두에게 이 재판과 마녀사냥에 의심을 품게 한다. 에바는 결국 돈을 훔쳐 혼자 배를 타고 떠난다. 그녀의 뒷얘기는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고 선함이 존재한다면, 스스로를 용서하고 생을 마감한 존과 달리, 그녀의 죄책감은 살아있는 지옥을 살게 할 것이다.

     

    패리스목사와 레베카 목사, 해일목사, 댄버스 재판장은 이 마을에서 권위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뜻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다. 패리스목사와 댄버스 재판장은 권위적이고 세속적인 인물들이다. 자신들의 이익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재판을 이끌어 나간다. 마을 사람에게 평판이 좋지 않고, 평소 존 프락터와 사이가 좋지 않던 패리스목사는 딸과 소녀들이 악마를 부르는 행위에 존이 가담했음을 적극 지지한다. 마지막 댄버스는 존 프락터의 선함을 끝내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이 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모두 악마와 내통한 것이다’ 라며 끝내 교수형에 처하게 한다. 특히 에바게일과 소녀들의 거짓연기에 넘어가 메리에게 억압하는 장면은 맹목적인 신념에 권위가 더해졌을 때 일어나는 비극을 여실히 보여줬다. 다른 마을에서 온 해일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지만 존처럼 세일럼의 악마사건에 대해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처음 엘리자베스가 고발당했을 땐 부부의 신앙심을 의심했지만, 그들은 선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레베카 목사가 고발된 것을 보고 ‘그녀가 정말 악마와 내통했다면 이 마을엔 희망이 없다’고 말하며 이 사건엔 거짓이 숨어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존이 교수형에 처할 수밖에 없자 결국 ‘신의 목숨은 선물’이기에 그가 자백을 하길 원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함을 지켜내기 위해 존과 레베카 목사는 어쩌면 스스로 교수형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듯 이 극에서 마을에서 선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교수형을 당하게 되면 의심을 받기 때문에 끈임없이 자백을 요구한다. 자일스는 자백을 하도록 고문을 받았는데, 힘없는 노인의 가슴 위로 큰 돌덩어리가 쌓여갈 때 마다 그는 ‘하나 더’ 라고 얘기하며 자신의 선함을 지켜냈다.

     

    의미

    존과 에비게일, 그리고 엘리자베스. ‘사랑’ 이라는 것에 대해 세 사람이 표현하고 느끼는 가치는 너무나 다르다. 존이 선한 인물의 주인공이지만, 그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이름에 대한 책임 또한 있겠지만 그의 죽음에는 정당성이 존재한기 때문이다. 에비게일이라는, 그의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반성할 길이었을 것이다. 아프고 냉랭한 아내 엘리자베스를 뒤로 한 채, 그는 잠시 에비게일에게 마음을 준다. 그것을 계기로 에비게일은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그를 영원히 곁에 두려 한다. 이 비뚤어진 사랑이 에비게일의 무자비한 마녀사냥에 본격 불을 붙인다. 영악하고 오만한 그녀의 사랑은 그것이 죄 인걸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불 속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녀가 모든 것을 인정하고 뒤돌아가는 순간 남은 건 절벽 아래 죽음 뿐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순종적인 여성이다. 그가 바람이 난 것을 알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태도로 이 가정을 지켜 나간다. 그녀에겐 끌려가는 순간까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그리고 죽음 앞에서 남편의 모든 선택을 존중해주고 그의 바람엔 자신의 냉랭함도 죄라고 얘기해준다. 사실 이 극에서 가장 연약하고 순종적이면서도 가장 굳건하고 강한 인물은 엘리자베스다. 그 누구보다 존 프락터가 살기를 희망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 순간에도 남편이 죄책감을 비워내고 떳떳한 선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하나되길 바라며 죽음을 선택한 그를 지지하는 모습은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셋은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욕망 아래 죄를 지었다. 존은 에바와 엘리자베스 모두에게 죄를 지었고, 그는 억울한 악마놀음 이라는 오명을 쓴 것이 아닌, 스스로의 죄를 씻고 이름을 지켜내며 고결하게 떠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는 선택을 한 하녀 메리도 있다. 같은 상황 속에서 그녀는 결국 이름을 더럽히고 악마와 내통함을 인정하고 존 프락터를 고발하면서 목숨을 부지한다. 존의 선택은 분명 희생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이 극에서 메리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진 않다. 그것은 선택과 가치의 문제고, 해일의 말 처럼 목숨은 신이 주신 선물이다. 그것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지킨 것이고 존은 자신의 목숨 을 잃은 대신 더 이상 타인의 목숨이 희생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기에, 그와 레베카 목사, 그리고 끝까지 신념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름이 아름답고 성스럽게 남을 수 있었다. 그들의 신념은 빛이자, 곧 이 극이 상징하는 가치다.

    ​연극 인터뷰

    국립극단에서 주최한 시련 연극에서 존 프락터 역의 지현준 배우의 인터뷰를 보았다. 존 프락터의 연기를 통해 자기가 지키는 것이 뭔지, 그리고 자기가 진짜 살아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됐다고 한다.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면서 어느날 부터 그저 물리적인 욕망,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게 됐다. 정작 우리 내면의 깊은 빛으로부터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는 잊고 살아왔다. 내가 진짜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위해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인지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살아가야겠다. 언젠가 나의 겉껍데기는 세상을 떠나도 이름만큼은 영원히 세상에 두고 떠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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